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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녹색광선

    문학적 영상미가 돋보이는 무겁지 않은 예술영화

    이 영화에서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중년의 여자도, 주인공인 이십 대 여성 델핀도 녹색 광선에 대해 말하고 생각한다. 태양의 적광이 수평선 아래로 잠기면 하늘과 바다에 잠깐 녹색 띠가 나타나는데, 이 녹색 광선이 빚어내는 순간은 부지불식간에 삶의 진실이 드러나는 순간이 된다. 물론 살면서 이 녹색 광선을 볼 수 있는 기회는 그리 많지 않다.

    그 진실의 아름다움과 만나기 위해 델핀은 바캉스 기간 동안 내내 해변을 따라 우울한 소요를 거듭한다. 하지만 에릭 로메르의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녹색 광선>에는 과잉이 없다. 델핀의 우울은 정신병에 걸리지 않을 만큼의 무게이고, 마지막 진실을 확인하는 순간도 드라마틱하지 않다. 삶의 표면을 이야기하다가도 얼핏 그 심층을 한 번 돌아보게 하고, 또 불확정적 사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도 그 사건을 만든 필연적 계기들을 영화 속 인물들의 정서와 감정에서 찾게 만드는 에릭 로메르의 영화들은 '문학적'이다.

    사실 그의 배우들은 문어체의 말을 많이 하며, 또 철학개론이나 문학개론 시간 외에는 별로 들어본 적이 없는 내용의 이야기들을 주고받는다. 게다가 영화 속에서는 주로 문학작품이나 철학책이 언급된다.

    <녹색광선> 역시 랭보의 시로 시작해 쥘 베른을 거쳐가며, 델핀은 소설을 읽다가 마침내 자신이 꿈꿔오던 연인을 만난다. 어떤 사람은 그의 영화에서 프루스트와 파스칼, 발자크와 헨리 제임스의 영향을 읽을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문학적인 것만큼 또 영화적이다. 빛의 움직임, 특히 일광과 석양을  인물의 심상에 맟추어 잡아내는 솜씨나, 배우들의 감탄할 만한 즉흥 연기, 프랑스 도시들과 해안지방의 풍광을 풍요롭게 활용하는 것 따위는 분명 문학적인 경지를 넘어선다. 또한 그의 영화는 무거운 듯하면서도 가볍고, 속물적인 듯하면서도 절박해서 주인공들의 지적 허영은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일상의 지혜를 이기지 못한다.

    에릭 로베르는 [카이에 뒤 시네마]의 비평가로 시작해 흔히 '도덕이야기'로 묶이는 여섯 편의 영화<모의 집에서의 하룻밤>(1969), <클레르의 무릎>(1970), <오후의 클로에>(1972)의 사이클이 끝난 뒤, 클라이스트의 소설과 중세에 쓰인 글로 영화를 만들었다. 이후 로메르는 1980년에 <비행사의 아내>라는 영화로 '코미디와 격언' 시리즈를 시작하는데, <녹색광선>(1986)은 그 시리즈의 한 편이다. 

    파리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는 델핀은 바캉스를 맞아 당황한다. 남자친구가 있긴 하지만 소원해진 데다 가족들은 그리스 등으로 떠나고 친구의 빈 별장으로 휴가를 가보지만 휴양지의 지나친 가벼움에 점점 더 소외감만 느낄 뿐이다. 하지만 그는 우연히 녹색 광선에 대해 듣게 되고, 또 거리에서 자신의 운명을 알려주는 듯한 카드를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녹색광선을 함께 볼 남자를 기다리게 되는데. 프롤로그에 인용된 랭보의 시처럼 마침내 그 시간이 오고 관객들은 델핀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가슴 설레는 과정을 함께하게 된다.

    이미 몇 가지로 우상화된 영화라는 매체의 성격을, 심각하고 무거운 스타일을 동원하기보다 이렇게 깜찍하고 귀여운 영화를 이용해 바꾸는 작업은 한층 더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에릭 로메르는 1960~70년대 영화사에 '영화적 문학성'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것을 소개했고, 그곳에서 18세기와20세기는 매우 역설적이고 희극적인 방식으로 만났다. 그 만남 속에서 유럽 영화의 우상적 얼굴, 즉 고급 예술로서의 문예영화는 매우 명랑한 모습을 띠게 됐다. 그래서 예술영화관을 나오며 반드시 철학자의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게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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