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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피스토

    나치에 부역한 연극인의 반생

    이슈트반 서보는 1956년 반소 봉기 이후 탄생한 새로운 헝가리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이다. 그는 당시 동서 유럽을 휩쓸던 모더니즘과 작가주의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단편시대를 거쳐 1961년에 <백일몽의 시대>로 장편영화감독이 된 서보의 초기 영화들은 명백히 트뤼포와 고다르를 반영하고 있으며, 레네의 시간에 대한 실험을 적극 수용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의 영화는 <부다페스트 이야기>(1976)를 기점으로 크게 전환한다. 그때까지의 영화가 시간과 몽타주, 현실과 환상에 대한 파격적인 형식 실험에 치우쳤다면, <신뢰>(1979) 이후의 영화는 리얼리즘 양식을 주된 서사구조로 채택하고 있다. 그는 늘 시대의 전형인 개인에 초점을 두는데, 초기영화가 비극적 상황조차 낙관의 시선으로 감싸고 있다면, 후기의 그는 시대의 희생당한 인물들의 비극적 파멸에 동정 어린 눈길을 보낸다. 서독과 합작한 <메피스토>(1980)는 서보의 후기 특성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서방의 대중에게 각인시킨 작품이다.

    클라우드 만이 1936년에 쓴 동명 소설을 각색한 이 영화는 브레히트의 혁명적 연극에서 출발해 나치즘의 선전원으로 전락하는 한 극예술가의 반생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 화프겐의 모델은 독일 현대연극사의 한쪽을 차지하는 구스타프 그륀트겐스(1899~1963)다.함부르크 지젤 극단에서 연기 경력을 쌓기 시작해 나치 아래서 베를린 국립극장장을 지낸 그륀트겐스는 1932년 상영된 <파우스트>의 메피스토텔레스역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프리츠 랑의 <M>에서 지하세계의 음흉한 두목으로 출연하기도 했다. 사실 토마스 만의 아들인 클라우스 만이 소설 [메피스토]를 쓴 것은 구스타프 그륀트겐스의 죄악을 고발하기 위해서였다. 여기에는 사적 감정이 개입되어 있었다. 그의 여동생 에리카만이 바로 1920년대 그륀트겐스의 동료이자 애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서보는 그를 매도하지 않는다. 그는 회프겐이라는 인물에 내재된 욕망과 결핍, 두려움 따위를 복합적인 관점에서 조명한다. 회프겐은 출세를 위해 베를린 극장장의 딸과 결혼하고, 나치 장군의 애인에게 접근한다. 하지만 이와는 달리 그는 정부를 해외로 도피 시키고, 동료를 밀고하면서도 반나치 활동으로 체포당한 친구 오토의 석방을 탄원하기도 하며, 나치에 협력하면 할수록 무대에 더욱 광적으로 몰두하기도 하는 인물이다.

    서보는 그를 연민한다. 이 점은 끝 장면에서 분명해진다. 회프겐은 사방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경기장에 서 있다. 후원자인 괴링 장군의 커다란 웃음소리를 들으며 그는 자신이 뒤쫒는 스포트라이트를 피해 달아나면서 이렇게 중얼거린다.

    "나한테 뭘 원하는 거지....난 단지 배우일 뿐인데...."

    서보에 따르면, 회프겐은 끝없이 스포트라이트(출세, 갈채, 명성)만 동경했다. 그는 그것에 모든 것을 종속시켰지만, 결국 바로 그것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물론 그는 예술적 지성을 결여한 인물이며, 천박한 인격의 소유자다, 하지만 서보는 그가 특수한 개인이 아니라 시대 속에 놓인 보편적 개인이라고 말한다. 이 인물상은 <레들 대령>으로 이어지지만 <레들 대령>과 비교하면 서보의 관점은 분열돼 있다.

    서보는 외적 상황은 리얼리즘이고, 내면세계는 표현주의적 미장센으로 잡아내고 있다.전자가 교훈극을 낳는다면, 후자는 비극을 예고한다. 서보가 화려한 기법으로 부각한 회프겐(클라우스 마리아 브란다우어)의 자기도취적 무대 연기는 <천국의 아이들>의 장 루이 바로처럼 관객을 빨아들인다. 비극이 너무 생생해지면서 상투적인 교훈극으로 변질되어 버린 것이다.

    영화는 2차 대전 이전의 상황에서 끝나지만, 그륀트겐스는 전후에도 계속 활동했다. 그는 뒤셀로르프와 함부르크 시립극장장을 지냈으며, 뒤렌마트 같은 현대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다시 <파우스트>를 올렸는지는 알 수 없다. 서보의 해석대로라면 그는 다시는 메피스토텔레스를 맡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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