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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회의 인간 소외 고발한 채플린의 마지막 무성영화
헐렁헐렁항 바지에 꽉 끼는 윗도리, 작은 중산모에 크고 낡아빠진 구두, 짧은 콧수염에 특유의 마당발 걸음, 그리고 옆구리에 지팡이를 낀 구시대의 신사. 서울의 수많은 레스토랑 간판에 새겨져 있어 이제는 그 분장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의미도 다 바래버린 형상. 이 형상은 찰리 채플린이 지금부터 100년 전, 처음 영화에 출연하면서 창조한 방랑자의 모습이다. 시대를 거슬러 가는 이 방랑자의 분장은 모든 채플린의 무성영화에서 산업화를 향해 치닫는 미국 사회의 물질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는 존재의 상징이었으며, 빅토리아 시대의 신사도와 자부심으로 전통을 고수하며 현대 사회를 비판하는 이물의 표상이었다.
1936년도 영화 <모던 타임스>는 채플린이 방랑자로 분장하고 등장한 마지막 영화이자 그의 마지막 무성영화이다. 방랑자는 발레와 같은 슬랩스틱 제스체를 통해 기계 만능의 현대를 풍자하는 한편 감상적 로맨스와 함께 그 사회를 떠남으로써 그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준다. 채플린에게 말하는 방랑자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으나 이 마지막 무성영화에서는 방랑자가 무국적의 묘한 언어로 노래하게 함으로써 무성과 유성의 경계를 넘어버린다.
<모던타임스>에서 채플린이 그리는 현대는 냉혹하다. 노동자들은 축사로 끌려가는 양떼처럼 공장으로 몰려 들어가고, 자본가는 커다란 스크린을 통해 노동자들을 감시한다. 최소의 시간으로 최대의 생산을 얻기 위해서 노동자들은 숨 쉴 틈도 없으며 화장실 가는 시간도 체크당한다. 화장실에서 담배라도 한대 피우려 하면 한쪽 벽의 대형 스크린에서 자본가가 불호령을 내린다. 점심시간도 아까워 자본가는 작업 중에 급식할 수 있는 자동급식기계를 설치한다. 자동화된 일터는 실직자를 대량 생산하고, 그들은 거리에서 시위를 벌인다. 굶주림 때문에 뻥하나를 훔치는 사람도 있도, 시위를 하다가 총에 맞아 죽는 이도 있다. 그러한 이들 때문에 거리에는 경찰관들이 가득하다.
주인공 방랑자는 현대 노동자이다. 그는 무엇을 생산하는지 알 수 없는 작업대에서 볼트를 조인다. 그의 손이 반의 반초만 늦어도 일관작업체제는 엉망이 되고, 쉴 새 없이 볼트를 조이는 그이 두 손은 작업대를 떠나도 자동으로 움직인다. 그래서 여자의 엉덩이에 달린 단추도 조이려고 달려든다. 그는 자동급식기계를 시험하는 대상으로 뽑히지만,고장이 나 광포해진 기계는 그에게 음식물을 던지고, 그를 폭행하고, 미치게 하고, 거대한 기계의 흐름 속으로 삼켜버린다. 거리에는 그는 트럭의 꼬리에서 떨어진 붉은 깃발을 들고뛰다가 시위대열에 앞장서기도 하며, 고아 소녀를 만나 가정을 꿈꾸고 직업을 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방랑자는 현대의 작업에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 소녀와 함께 지평선을 향해 떠난다.
대중사회에서 소멸되어가는 인간성에 대한 고발과 물질문명이 가져온 비인간성에 대한 비판을 담은 <모던타임스>는 공산주의적 경향을 지녔다는 이유로 물의를 일으켰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상영이 금지되었으며, 오스트리아에서는 붉은 깃발을 들고 뛰는 장면이 검열에서 잘렸다 한다. 그리고 이 영화와 뒤이어 만들어진 <위대한 독재자>, <무슈 베르두>에서 보여준 비판적이며 좌파적인 색채는 훗날 매카시 선풍이 할리우드를 뒤흔들 때 채플린이 미국에서 추방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담긴 비판의 소리가 아직도 또 앞으로도 유효하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