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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를 매료시킨 새로운 중국영화
1985년 첸 카이커의 <황토지>가 신 중국 영화의 탄생을 처음으로 외부 세계에 알린 이후, 장 이머우의 1988년작 <붉은 수수밭>은 전 세계가 신 중국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는 기폭제가 됐다. 서구의 관객들은 이국적이면서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구성에 매료됐다. 장 이머우는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를 허물려고 했고, <붉은 수수밭>은 그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한 셈이었다.
<붉은 수수밭>은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손자의 내레이션을 통해 20세기 초에는 일본의 침략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한 벽지 마을에 살던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도입부부터 이 작품은 관객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준다. 쉰 살이 넘은 양조장집주인인 문둥이에게 팔려가는 주얼(공리)의 붉은 가마와 웃옷을 벗어젖힌 건강한 가마꾼들의 춤과 노래는 시청각적으로 이국적인 느낌을 전달함과 함께 가련한 여인의 운명, 건강한 남성에 대한 주얼의 은근한 눈길, 중국의 봉건적 폐습등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프롤로그로서 확실한 인상을 남긴다.
중국적이면서 동시에 세계적인 것, 이것이 장 이머우 영화의 성공 비결이다. 이를테면 술은 중국인들에게 흔히 시적이며 낭만적인 이미지로 비친다. 이 작품에서도 고량주는 조부의 낭만적이고 남성적인 성격을 드러내는 모티브로 작용하는데, 이와 함께 병균을 물리치는 약의 열 할과 일본군에 맞서는 폭탄의 역할까지 한다. 즉, 고량주는 정열과 낭만, 생산과 활력, 단결과 의리의 상징이다. 서구인들은 여기서 니체의 디오니소스적 인간 정신의 재현이나 바흐친의 '카니발'을 떠올렸을 것이다. 특히 사흘간이나 술독에 빠져 노래를 부르는 조부의 모습에서 낭만과, 관습적이고 억압적인 도덕적 굴레에서의 탈출을 보았을 것이다.
<붉은 수수밭>은 분명 정치적인 영화가 아니다. 그러나 일면 1930년대 중국의 좌파 영화와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1930년대 중국의 좌파 영화가 그랬듯이 이 작품도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과 가부장제, 여성 해방과 육체해방을 이야기한다. 반일 항쟁에 관한 이야기는 다소 도식적으로 보이기도 하지만, 여성 주얼의 정체성과 연관 지어 보면 달리 읽을 수도 있다. 주얼은 전재의 전통적 여인상에서 벗어나 있다. 그는 양조장 주인이 살해된 뒤에는 양조장의 운명을 책임지는 반 모계사회의 가장이 되며, 일본군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라오한의 복수를 이끄는 지도자이기도 하다. 장이머우는 이런 개척적이고 능동적인 여인상과 함께 건장하고 낭만적인 남성상을 제시한다. 대부분 웃옷을 벗고 등장하는 조부와 양조장 일꾼들은 도덕적 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하늘과 땅의 도리를 알고 있으며, 또 자유롭다. 이들의 모습은 일본군의 제복과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이들의 건강한 신체는 오늘날 갈수록 은밀해지고 심리적 문제로 치부되는 '육체'를 과거의 자유로윤 집단의 영역으로 끌어내는 의미를 지닌다.
이처럼 조부모의 개인적 경험은 곧 집단의 경험이 되고, 동시에 중국 역사의 알레고리가 된다. 그래서 이 영화는 비정치적이면서도 역사의 흔적이 배어 있고, 전통적이면서도 동시에 비전통적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장 이머우의 연출 능력과 의도 덕분이다. 전통과 새로움의 조화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에 <붉은 수수밭>은 더욱 돋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