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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레이드 러너

    복제 인간 통해 휴머니즘 해부

    1982년,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는 스티븐 스필버그 <E.T>와 동시에 개봉돼 흥행 경쟁을 벌이다가 일주일 만에 백기를 들고 말았다. 관객들은 현실도피적인 <E.T>의 유토피아를 어둡고 비관적인 <블레이드러너>의 디스토피아보다 훨씬 더 좋아했다. 이 영화를 '저주받은 걸작'의 명단에 올려놓은 이들은 컬트 영화광들과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이었다. 포스트 모더니스트에게 이 영화는 공간의 혼성 모방과 정신분열증으로 특징되는 포스트 모던 사회의 징후를 보여주는 일종의 교과서였다.

    2019년, 3차 세계대전의 후유증으로 검은 비가 내리는 로스앤젤레스의 이미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혼성 모방으로 채워져 있다. 세계도처에서 이주해 온 다양한 인종들, 코카콜라와 일본 여자 광고판, 용의 형사을 한 네온사인, 그리스 로마 시대와 바로크 시대의 건물, 마천루 위에 자리 잡은 고대 이집트의 피라미드.

    로스앤젤레스는 또한 후기 산업사회의 두 얼굴을  보여준다. 햇빛이 없는 지상에서 비참하게 살아가는 노동자들과 지상에서 벗어나 맑은 공기를 마시는 부르주아들, 편리한 문명의 이기 옆에 널려 있는 쓰레기...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주의는 모든 것을 소모하고 황폐화시켜 버린다. 스물다섯 살에 늙은이가 되어버린 세바스티안은 발전의 속도가 가속화해 시간과 공간의 압축현상이 일어나는 후기 산업사회와 닮아있다.

    복제인간 레플리컨트의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없다. 오직 현대만이 존재한다. 시간의 연속성을 경험할 수 없고, 따라서 '나'라는 정체성을 가질 수 없는 레플리컨트의 상태는 정신분열증이다. 그들은 자신의 기원을 찾아 지구로 온다. 과거의 기억과 역사를 보여주기 가장 중요한 단서는 사진과 어머니다.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라는 슬로건으로 만들어진 레플리컨트는 진짜와 가짜, 현실과 상상, 원본과 카피의 구분이 없어지는 단계로 진입하는데, 이것은 장 보드리야르의 모조품과 원본 없는 복제에 대한 논의로 이어진다.

    포스트 모더니스트들의 해석에 성서에 대한 패러디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더하면, <블레이드러너>는 더욱 복잡한 텍스트가 된다. '자본가이자 과학자인 타이렐이 리플리컨트를 만들고 4년의 수명을 주었다'는 내러티브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고 일정한 수명을 주었다'는 메타 내러티브에서 온 것이다. 레플리컨트 로이는 아버지 타이렐을 찾아서 수명을 연장해 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섭리는 변경될 수 없는 것'이라는 대답에, 로이는 타이렐의 눈(오이디푸스처럼)을 찔러 죽인다. 로이는 레플리컨트를 제거하는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를 살려주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이미지로 죽어간다.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복제인간은 '인간은 무엇이며, 휴머니즘이란 무엇인가'라는 르네상스 이후부터 계속된 논의를 확신에서 의문으로 바꾸어놓는다.

    1992년 <블레이드 러너>는 감독판으로 다시 개봉되었다. 1982년판 과의 차이는 데커드를 레플리컨트라고 암시하는 부분이다. 그 결과, 낯선 공간에 타자를 던져놓고 그들이 악전고투하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그려온 리들리 스콧의 영화 계보에 따라 영화를 해석할 수 있는 여지는 더 많아졌다.

    타자 레플리컨트가 낯선 지구에 찾아와서 패배하는 이야기로 영화를 읽는 것은 포스트 식민주의를 논의하는 1990년대에 더욱 적합한 해석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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