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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즈업 중심의 형식미 탁월
"잔 다르크의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을 상자 속에 간직하고 싶다."
루이스 부뉴엘이 이 영화에 대해 한 말이다. 하지만 에릭 로드 같은 영화사가 카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을 고통에 빠진 여성들(이 영화와 <분노의 날>(1943), <오데트>(1955), <게르트루트>(1964) 같은 작품)을 가학적으로 재현해내는 남성우월주의자라고 평가했다.
반면 질 들뢰즈의 견해는 달랐다. 그는 드레이어야말로 관객에게 최고의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작품을 만든다고 평했다. 또 혹자는 "절규하는 소리가 나는 무성영화"라고 이 영화를 정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어떠한 관점에서 보건 부정할 수 없는 점은 그가 매우 특이한 형식으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이다. 최소한의 카메라 움직임과 미리멀리즘으로 관객들의 정서를 이끌어내는 드레이어는 사실 일본의 오즈야스지로 감독이나 프랑스의 브레송과 더불어 세계 영화사에서 독특한 전통을 이루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느낌표나 의문부호보다는 말줄임표를 즐겨 사용하며, 오히려 데스마스크에서 가장 강렬한 삶의 표현을 포착한다.
1920년대 후반, 르네 클레르와 페르낭 레제,루이스 부뉴엘이 초현실주의 아방가르드 영화에 관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을 때, 덴마크에서 프랑스로 옮겨온 드레이어는 작품을 만들어달라는 프랑스 영화사의 제안을 받는다.
역사상 흥미로운 세 명의 여성들, 즉 카트린 드 메디치와 마리 앙투아네트, 잔 다르크 가운데 한 사람을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를 생각하던 그는 드디어 마지막 인물로 낙점한 뒤, 중세의 일상을 재현하기 위해 꼼꼼하게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잔 다르크 역을 맡을 배우로는 순박한 시골 처녀 같으면서도 순교자의 열정과 고통을 간직한 지방 연극배우 마리아 팔코네티를 선정한다.
모든 사람들을 놀라운 시각 경험에 빠지게 한 섬세한 클로즈업 중심의 이 영화는 다양한 톤에 반응하는 팬크로메틱 흑백 필름을 사용했고,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서술구조에 적합한 짧은 길이의 '숏'들로 이루어진 평행 편집을 채택했다.
전체적으로는 잔 다르크를 마녀로 몰기 위한 재판과정과 화형장면으로 나뉘어 있으며, 역사적으로 실재했던 인물들(주교, 영국인, 판사 그리고 군중)이 각기 다른 종교적 신념과 분노를 가지고 이 전쟁토에 뛰어든다.
'숏'과 거기에 대응하는 '뒤집힌 숏'의 관습적인 사용을 피해가면서 흐르듯 이어지는 클로즈업을 채택한 이 영화의 프레임을 가득 채우는 것은 잔 다르크의 고통에 찬 얼굴과 뒤편으로 보이는 하얀색의 텅 빈 실내공간이다. 말하자면 원근법에 따른 공간적 깊이가 부재하다는 것인데, 이것을 대체하는 것이 바로 정신적 깊이이며, 이때 잔 다르크 역을 맡은 팔코네티의 얼굴은 마치 중세의 종교적 도화상처럼 정신적 형상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이 영화의 후반부는 종교적 구원의 영원성보다는 잔 다르크의 삶에 대한 열정에 초점을 맞춘다. 그가 삭발당한 채 화형대에 올라 "오늘밤 나는 어디에 있을까"하고 독백할 때, 그리고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과 하늘을 나는 비둘기들, 어머니의 품에 편안히 안긴 아기의 이미지들이 나타날 때, 천상의 세계는 멀어 보이고 지상은 그보다 가까워 보인다.
하지만 이런 문제제기는 이제 정말 고전적으로, 즉 진부하게 보인다. 따라서 이 영화가 영화 100년사에서 갖는 의미는 형식미의 탁월함 정도를 머무를 것 같다.
그러나 들뢰즈의 의견은 또 다르다, 이 영화는 오히려 세상이 저질 영화처럼 보이는 20세기에 태어난 서정적 영화이며, 바로 그 정서적 효과를 통해 관객들에게 잃어버린 것을 복원할 수 있다는 꿈을 준다는 것이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복원한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