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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택시드라이버

    1970년대 미국의 혼란 그린 '혼란스러운 영화'

    1970년대의 미국 영화를 베트남 전쟁과 떼어내 살피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트남 전쟁은 1960년대 이래 발전해 온 급진적 사회운동, 청년문화, 페미니즘, 흑인 인권운동, 동생애자들의 투쟁 등을 폭발시키는 외곽 같은 역할을 했다. 미국 사회는 전면적인 위기에 빠진 듯이 보였다.

    워터게이트 사건은 이 위기를 더 부추겼다. 지배층은 대처할 능력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대안적 사회개혁 프로그램이 작동 한 것도 아니었다. 미국을 지탱하고 있는 거대한 보수와 냉전의 기반이 그만큼 두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1970년대의 미국의 위기는 혁명이 아니라 혼란의 양상을 보였다. 1970년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미국 영화'는 베트남 전쟁을 결코'인류의 양심을 그어진 상처'로 그리는 법이 없다. 그들에게 그 전쟁은 자신들의 혼란을 증폭시킨 계기일 뿐이었다.

    문제의식의 초점은 늘 자신들의 붕괴증후군에 모아져 있었다. 우리의 관점에서 <디어헌터>나 <지옥의 묵시록>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들 또한 항변의 근거를 가진 셈이다.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는 바로 이 혼란에 관한 혼란스런 영화다. 여기서도 주인공 트래비스 비클(로버트 드 니로)은 베트남에서 귀향한 제대 군인으로 등장하지만, 그는 베트남 전쟁에 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리면서도 그 원인을 찾으려 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결단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는 그도 모른다. 트래비스는 택시를 몰고 뉴욕의 밤거리를 헤매고 다닌다. 의사소통이 단절된 채 몽유병자처럼 현실에 발을 대고 있고 못한 그에게 도시는 형태를 잃고 떠다니는 이미지일 뿐이다. 뉴욕의 뒷골목은 쓰레기로 가득하다. 그의 결단은 이 쓰레기들과 연관되어 있다. 물론 이 속에는 창녀, 포주, 마약꾼, 구역질 나는 검둥이들, 호모와 레즈비언 같은 '인간쓰레기'가 포함된다. 그는 거리를 청소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이때 대통령선거 홍보전을 치르는 베티를 만나지만, 그 관계는 '어떤 결단'을 재촉하는 장치아자 허구의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거리에서 십 대의 창녀 아이리스(조디포스터)를 만나면서 드디어 어떤 결단을 내린다. 그것은 인간쓰레기들을 피로써 씻어내는 일이다.

    트래비스는 사회의 정상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자에게는 정신병자이지만, 미국 영화의 전통에서 보면 도시에 나타난 마을의 청소부, 곧 보안관이다. 이러한 성격 부여는 공포영화와 서부극의 영향을 엿보게한다. 그리고 그가 결단에 이르기까지 내보이는 극심한 도덕적, 정치적 혼란은 이러한 성격화의 필연적인 귀결이다. 그는 대통령 후보 팰런타인을 암살하려고 주변을 맴돌지만, 결국은 아이리스의 포주 스폿(하비 케이텔)을 살해하고 만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빠져있던 혼란의 터널에서 벗어나고 도시의 영웅으로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의미는 애매하기 짝이 없다. 그는 과연 존재의 혼란에서 벗어난 것일까? 그는 영웅으로 불러 합당한 인물일까? 그는 과연 아이리스를 사랑하기나 한 것일까?

    <택시 드라이버>는 이러한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다. 미학적 견지에서 진보적이었던 스코시즈와 정치적으로 신파시스트였던 폴슈레이더의 기묘한 결합은 이 모든 혼란의 근원이다. 초월로서의 어떤 결단, 영웅주의, 인간쓰레기에 대한 경멸 따위가 슈레이더의 세계라면 뉴욕의 뒷골목, 트래비스의 소외, 존재의 혼란은 스코시즈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영화 막바지에 트래비스가 모호크족의 머리 모양을 하고 아파치족 흉내 낸 스폿을 쏘는 장면은 그러한 작가적 모순의 첨예한 돌출로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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