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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을 좇아 헤매는 '인간 자화상'
찰리 채플린은 1889년 영굴 런던에서 태어나 1977년 여든여덟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열두 살 때 극단의 아역 배우를 시작으로 유리공, 이발사, 팬터마임 배우 등을 전전했으며, 네 번 결혼하고 한 번 약혼하는 동안 열 명의 자녀를 낳았다. 1910년에 팬터마임 배우로 미국에 발을 디딘 그는 이후 40여 년 간 미국에서 살았지만, 1947년부터 시작된 할리우드의 '빨갱이 사냥'에 걸려 1952년 추방당했다. 그는 평생 81편의 작품에 관여했는데, 이 가운데 70여 편에서 직접 감독과 주연을 맡았다.
<황금광시대>는 흥행에 크게 성공했고 지금도 그이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화다.<시티 라이트>(1931)가 자본주의가 이미 자리를 잡은 도시의 쓸쓸한 풍경이자 돈과 인격에 관한 수채화라면, <황금광시대>는 황금을 좇아 불나방처럼 헤매는 인간들을 그린 흑백사진이다. <모던 타임
>(1936)가 자본과 권력에 대한 비판의 시작이라면, <황금광시대>는 공격을 위한 몸풀이다. 채플린의 5대 희극 안에는 이 세 편 외에 <독재자>와 <무슈 베르두>가 추가된다. 그리고 이 다섯 편의 희극은 채플린의 최고의 영화들 속에 포함된다.
채플린은 삶과 사회에 대해 지극히 비관적이었던 대신에 그것을 묘사하는 무기로 웃음을 선택한 셈이었다. 물론 그가 웃음을 택한 것은 불우했던 시절을 되돌아보지 않으려는 심리와 철벽 같은 세상에 대한 전술이었겠지만, 이 속에 상업주의적 타협이 없었다고는 볼 수 없다. 밝은 화면과 또렷한 사물들, 사건 위주의 단순한 이야기구조에서 볼 수있듯이 그의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의 모두가 그랬듯 예술보다는 상품에 가까웠다. 하지만 채플린의 영화들, 특히 <황금광시대>가 세상을 향해 내 쏘았던 질타는 사회비평적 모범으로서 이후의 영화에 끊임없이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정신적인 부분과 더불어 우리는 어두운 도시를 배경으로 한 많은 영화에서 채플린 영화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찰리는 지독한 굶주림 때문에 구두를 삶아 먹으며 구두창의 못을 뼈다귀처럼 핥고, 찰리의 옆에 있던 사람은 찰리를 닭으로 착각하고 덤벼든다. 한편 금광을 발견한 사람들은 서로 금광을 차지하겠다며 자기들끼리 싸우지만, 현실(눈사태)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디에도 희망은 없고, 현실은 언제나 초라했으며, 욕망은 항상 아귀처럼 달려들었다. 그래서 찰리로 나온 채플린은 웃음으로, 엉뚱한 댄스 스탭으로, 초라함과 낭만이 가득한 풍경으로 그것에 대항했다. 하지만 영화는 채플린이 금광을 발견한 사람의 동료가 되고, 게다가 아름다운 주점 무용수를 품에 안고 행복한 웃음을 지으며 키스를 나누려는 장면으로 끝난다. 원래 우수화 배애로 가득한 사회비판적 영화였으나, 채플린 역시 할리우드 사람답게 할리우드의 고색창연한 행복한 결말의 관습을 이어받은 것이다. 상업주의와 야비하게 타협한 셈이었다.
이어 <시티 라이트>에서 서정적으로 현대의 모습을 그린 채플린은 <모던타임스>에 가서야 구체적인 비판을 시작한다. 이것은 <독재자>(1940)의 탄생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짧은 콧수염의 히틀러와 찰리. 찰리는 꽉 죄는 윗도리와 헐렁한 바지, 군함만 한 구두와 대나무 지팡이로 히틀러에 대항했다. 남들은 현실에 안주할 나이인 쉰 살 때의 일이었다.
이런 채플린이 두번째 부인인 리타 그레이와 몰래 결혼하고 <황금광시대>를 만들 즈음, 절망한 독일의 영화예술가들은 <마지막웃음>(1942)을 만들거나 필름 누아르의 원조격인 <활기 없는 거리>를 만들고 있었고, 한국에서는 나운규가 <아리랑>(1926)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가 이제 막 근대 영화로 진입하던 시기의 일이었고, 그 뒤 각 나라의 영화 역사는 그 나라의 사정에 따라 걸음을 달리했다. <황금광시대>는 이러한 영화사의 비극성과 현대의 비극성 모두를 예고하고 있었다.